사찰의 중심에는 여러 부처님이 모셔져 있지만,
그중에서도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은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 이름은 산스크리트어 Vairocana에서 유래했으며,
뜻은 “온 세상을 두루 비추는 큰 빛”입니다.
비로자나불은 불교의 세계관에서
우주적 부처, 즉 모든 존재의 근원이며,
모든 깨달음의 본체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인 대적광전(大寂光殿)은
‘고요 속의 빛, 진리의 궁전’이라는 의미를 지닌 성스러운 공간입니다.
오대산 월정사 대적광전의 비로자나불은
‘모든 존재를 비추는 우주의 빛’으로 불교 법신의 본질을 상징합니다.
그 유래와 상징, 그리고 현대 불자에게 전하는 깨달음의 의미를 살펴봅니다.
🪷 1. 대적광전 — 빛과 고요의 공간
대적광전은 이름 그대로 ‘대(大) + 적(寂) + 광(光)’,
즉 ‘지극히 고요한 빛’을 뜻합니다.
대웅전이 인간 부처인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한
“현실 세계의 깨달음”을 상징한다면,
대적광전은 우주적 법신불(法身佛)인 비로자나불을 모심으로써
“진리 그 자체의 본질”을 상징합니다.
이곳은 깨달음을 ‘닿을 곳’이 아니라,
이미 ‘모든 것 속에 존재하는 절대 진리’로 바라보는 공간입니다.
즉, 대적광전은 수행의 종착점이자,
우리가 본래 지닌 불성(佛性)을 자각하는 자리입니다.
🪷 2. 비로자나불의 상징 — 우주를 비추는 법신불
비로자나불은 세 가지 불신(佛身) 가운데 ‘법신불(法身佛)’로 불립니다.
이는 부처님이 단순한 인간이나 신의 존재가 아니라,
법(法), 즉 진리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비로자나불은 형상으로는 표현되지만,
그 본질은 무형(無形)에 가깝습니다.
탱화나 불상에서는 보통 원만구족한 얼굴, 화려한 보관(寶冠),
그리고 지권인(智拳印)을 맺은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지권인은 오른손의 검지를 왼손으로 감싸 쥐는 손 모양으로, 이는 ‘지혜가 자비를 감싸고,
자비가 다시 지혜를 품는다’는 뜻을 지닙니다.
즉, 모든 대립이 통합된 깨달음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 3. 오대산 월정사의 비로자나불
비로자나불의 중심 신앙지는 중국의 오대산이지만,
우리나라에서도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가 그 성지를 계승한 대표적인 사찰입니다.
월정사 대적광전에는 비로자나불 삼신불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가운데는 비로자나불, 왼쪽은 노사나불, 오른쪽은 석가모니불로,
이는 ‘법신–보신–화신’의 삼신불(三身佛) 구조를 시각화한 것입니다.
이 비로자나불상은 통일신라 시대 조성으로,
온화하면서도 장중한 얼굴,
그리고 정교한 지권인의 표현으로 한국 불상 미술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그 눈빛에는 ‘모든 존재가 이미 깨달음의 일부’라는
비로자나불 사상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월정사에 전해지는 설화에 따르면,
이 불상은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빛을 내는 부처님”으로 불리며,
밤이 되면 대적광전 안이 은은히 밝아졌다는 전승이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
“마음의 빛은 외부의 등불 없이도 존재한다”는
불교의 깨달음 철학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 4. 시대별 비로자나불 신앙의 변화
신라시대에는 비로자나불이 왕법과 불법의 통합을 상징했습니다.
국가의 질서와 백성의 평안을 “우주적 진리의 빛” 아래 두고자 한 것입니다.
고려시대에는 화엄종(華嚴宗)의 번성으로
비로자나불은 법계(法界)의 중심으로 자리 잡습니다.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화엄의 사상이
곧 비로자나불의 세계관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 이후로는 유교의 영향으로 다소 위축되었지만,
현대에 이르러 다시 “내 안의 법신불”로 해석되며
명상과 자각의 상징으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 5. 현대 불자에게 주는 메시지
현대의 비로자나불 신앙은
초월적인 신앙이 아니라 내면의 자각으로 이해됩니다.
즉, “모든 존재 안에 빛이 있다”는 가르침은
종교를 넘어 자존감과 평화의 철학으로 확장됩니다.
누구나 자신 안의 불성을 자각하면,
그 순간 이미 ‘법계의 중심’, 즉 비로자나불의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적광전에서 합장하는 행위는
멀리 있는 신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의 빛을 깨우는 수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로자나불은 밖에 있는 신이 아니라,
마음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나를 비추는 빛이다.”
🪷 6. 오대산 대적광전이 전하는 울림
월정사의 대적광전은 건축적으로도 독특합니다.
불단은 화려하지 않지만,
천정과 벽면의 단청은 ‘적광(寂光)’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청색과 금색의 대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는 고요한 가운데 존재하는 생명의 빛,
즉 ‘적(寂)’과 ‘광(光)’의 공존을 시각화한 것입니다.
그 빛이 바로 비로자나불의 진리이며,
그 고요함이 수행자의 마음이 향해야 할 곳입니다.
오대산을 찾는 이들이 “월정사는 마음이 맑아지는 절”이라고 하는 이유도, 이 대적광전의 분위기 속에서
자연과 마음, 빛과 고요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체험을 하기 때문입니다.
🪷 비로자나불의 빛은 지금 여기 있다
비로자나불의 세계는 먼 법계의 이상향이 아니라,
매 순간 우리가 마주하는 ‘지금 이 자리’ 속에 존재합니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듯,
삶의 괴로움 속에서도 지혜의 빛은 꺼지지 않습니다.
그 빛을 바라보는 것이 곧 수행이며,
그 빛을 믿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세상은 변하지만 빛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빛이 바로 비로자나불의 마음이다.”
오대산 전나무 길을 따라 사찰로 들어가는 과정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온전한 나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마음이 비워지는 것을 느끼고 일주문 앞에 섰을 때 비로소 비로자나불의 진리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